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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비교)

r10 vs r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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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31966년 1월 23일 04시 15분, 반루파가 설정한 신호 주파수가 통신단에서 송출되었고, 준비된 병력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데타는 개시되었다.
144144=== 쿠데타 시도와 실패 ===
145==== 1일차 ====
1461966년 1월 23일 04시 15분, 반루파 장교단은 사전에 설정된 내부 통신 주파수를 통해 쿠데타 개시 신호를 전군에 송출하였다. 통신단 내부 독립 교환기에서 발신된 신호는 루이나 고문단과 군정원 중앙통신망을 우회한 방식으로 암호화되어 발신되었으며, 이 신호를 수신한 예하 조직은 동시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명령 계통은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단위별 자율 실행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는 지휘 체계의 단절 상황에서도 작전이 진행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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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초기 작전은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되었고, 전술적 측면에서 보면 완벽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오전 5시 10분까지 반란군은 수도 방위사령부 통신본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군정원 청사 내 보급국, 통신실, 행정서기국을 점령하였다. 동시에 제3항공정비대 소속 병력은 북산공군기지의 관제탑과 활주로 진입로를 봉쇄하고, 항공통제실을 인계받았다. 이 과정에서 조직적인 교전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진압이나 저항은 대부분 국지적 충돌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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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작전 개시 2시간 이내인 오전 6시 30분경, 반루파는 오카베 나오유키(岡部尚之) 육군참모총장의 숙소를 급습하였으나, 오카베는 이미 사전에 경호 인력의 지원을 받아 현장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해당 작전은 유일하게 실패한 체포 작전이었으며, 이로 인해 쿠데타 측은 지휘 계통 마비 전략에 차질을 겪게 된다. 반면 하야시 에이조(林英三) 수도방위사령관은 오전 5시 45분경 별도 저항 없이 체포되었고, 루이나 고문단장 모리스 반 샤프트는 당시 관저에 체류 중이었으며, 약식 무장 병력의 통제 하에 별도 지정 숙소로 이송되었다. 다만 고문단장의 신변 확보는 외교적 문제로 직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은 이를 체포가 아닌 ‘안전 보호 조치’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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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오전 9시경, 반란군은 국왕 직속 통신망에 접근하여 '''“국군 일부가 헌정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임시 비상조치를 시행 중이며, 국민과 황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송출하였다. 해당 방송은 내무성 산하 라디오 채널을 통해 15분간 반복 송출되었고, 일부 민간 언론은 이를 ‘군사행동’ 혹은 ‘질서 재정비 시도’로 보도하였다. 같은 시각, 반란군은 제5차량대대 소속 장비를 이용하여 소규모 부대를 수도 중심가로 이동시켰고, 오전 11시부터 약 1시간 동안 수도 중앙대로를 행군하였다. 해당 행군은 무장한 군복 병력 약 200여 명이 통신차량 및 트럭과 함께 이동한 것으로 확인되며, 이 장면은 당시 시민들에 의해 촬영되어 이후 사건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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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오후 들어 반란군은 고위 지휘부 확보가 일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지역 내 핵심 군사시설 및 통신망을 장악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통신단 본관과 항공정비대, 차량정비창고, 병참기지 중 상당수가 반란군의 통제 하에 놓였으며, 일부 구역에서는 반란군의 ‘질서유지 명령’에 따라 민간 교통 통제가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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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반면 오카베 참모총장은 북동부 육군교육사령부로 이탈한 후, 루이나 고문단의 예비 연락망을 통해 상황을 보고하였고, 루이나 측은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주재 고문단 외부 네트워크를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까지 루이나 본국은 공식적으로 쿠데타 상황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북산 군정원 역시 실질적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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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월 23일 20시경, 반란군 내부에서는 계획된 다음 단계를 실행할지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국왕에게 루이나 고문단 철수 요청을 담은 긴급 상주(上奏)를 실시하고, 동시에 군정원에 잔존한 부서를 무력 해산시킬 예정이었으나, 참모총장의 탈출로 지휘 체계가 부분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정보가 확산되면서 내부의 긴장감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날 자정까지, 반란군은 수도 핵심 구역의 통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1일차 작전은 작전 개시 이후 최소 18시간 동안 목표 구역 80% 이상을 장악한 상태로 종료되었다. 이는 3일 간의 반란 중 가장 성공적이고 조직적인 국면이었다.
159==== 2일차 ====
1601966년 1월 24일 오전 05시경, 쿠데타 개시 이후 하루가 경과한 시점에서 반루파 반란군은 여전히 수도 중심부와 주요 군사 거점 상당수를 점거하고 있었다. 반란군은 전날 체포한 고위 인사들을 외부와 단절된 임시 구금소에 분산 수용하고 있었으며, 통신단, 항공정비창, 병참사령부, 차량정비창, 일부 보급창고 등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국왕직속 전속부대의 일부 간부들과 접촉을 시도하며 국왕에게 고문단 철수를 요청하는 공식 건의서를 전달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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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그러나 24일 오전부터 상황은 반란군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전날 탈출한 육군참모총장 '''오카베 나오유키(岡部尚之)'''는 루이나 고문단과 긴밀히 협의하여 임시 군령지휘본부를 육군교육사령부에 설치하고, 루이나 측의 예비 연락망을 통해 해외 주둔 루이나 군사고문단 및 주북산 루이나 대사관과의 접촉을 재개하였다. 이를 통해 확보된 정보와 통신망을 바탕으로, 루이나는 24일 오전 08시경부터 비공식적 진압군 편성을 본격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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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루이나 측은 공식적인 개입을 선언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산 정부의 요청을 가장한 ‘내부 질서 회복 지원’ 작전을 개시하였고, 벨포르-콜마르 연합사령부 예하에 배치된 헌병연락대, 통신감청부대, 수색정찰 중대를 24일 12시경부터 북산 내 거점으로 침투시켰다. 동시에 루이나 고문단 외부 조직을 통해, 친루파 장교 및 생존한 지휘관들과의 연결이 체계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도 외곽의 일부 예비연대가 오카베 참모총장의 명령을 승인하였으며, 루이나 헌병대가 이들 부대에 비공식 무장 장비를 제공한 사실도 사후 보고서에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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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오후 14시경, 반란군은 국왕 측에 공식 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사절단을 구성하였으나, 국왕경비대 측은 “왕궁 출입은 현 정세 안정 전까지 전면 금지”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에 따라 반란군은 국왕의 재가 확보에 실패하였고, 쿠데타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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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반란군은 내부 통제력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통신망과 이동경로는 여전히 상당 부분 점거되어 있었으나, 각 부대 간 연결 통제는 느슨해졌고, 예하 병력 일부가 '''‘자신들이 반란군인지 진압군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국왕의 재가를 받지 못함으로서 쿠데타의 명분을 상실래버린 후로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가 본격화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쿠데타가 계획된 내부 숙청이나 반루파 탄압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라는 설명과 달리, 국가 전체를 위협하는 무력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고, 일부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탈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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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같은 시각, 루이나가 주도한 ‘질서 회복 작전’이 수도 외곽에서 개시되었다. 루이나 헌병연락대 소속 지휘관 '''에밀 베르탕 대령(Émile Bertin)'''이 진입을 주도한 서부 방위선에서는, 이미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제12기갑중대가 루이나 측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교량 통제권을 이양하였고, 이어서 수색 정찰대가 도심 외곽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반란군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였고, ‘외곽 병력이 자체 해산 중’이라는 오보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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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저녁 18시경, 반란군 내부에서 작전 2단계에 대한 이견이 본격적으로 표출되었다. 미야기 겐타로(宮城健太郎) 중위는 수도 외곽 진출을 통한 방어선 형성 및 시간 확보를 주장하였으나, 요시카와 신지(吉川信司) 대위 등 일부는 오히려 '''“외부의 정보 차단과 방어 유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양측 간의 논의는 결론 없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하위 병력은 명령 체계의 혼선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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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24일 밤 22시, 루이나-북산 연합 지휘부는 본격적인 진압 작전 개시 명령을 승인하였고, 25일 03시를 기준으로 수도 재탈환 작전을 시행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시점에서 반란군은 이미 일부 거점에서 병력 부족과 이탈 현상을 겪고 있었으며, 내부 지휘 체계는 표면적으로는 유지되었으나, 사기 저하와 정보 격리 실패로 인해 통합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었다.
175==== 3일차 ====
145176=== 군사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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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78== 반란 실패의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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